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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by 아르투로 2024.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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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유신 체제의 성립 과정에서 발생한 윤필용 사건은 대통령 박정희가 결코 2인자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과, 박정희의 퇴임이나 후계를 논하는 것 자체가 최고의 불경죄임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윤필용 사건을 통해 박정희는 권력집단 내부에서 마치 ‘천황’과도 같은 초월적인 권위를 가진 존재로 등극했다. 박정희는 지난 20년간 자신을 그림자처럼 보좌해온 윤필용을 내침으로써 권력의 냉혹함을 가차없이 보였다.

 

5·16 쿠데타 당시 윤필용은 이른바 ‘혁명주체’가 아니었지만, 박정희와의 개인적인 군 인연 덕분에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또는 비서실장 대리로, 육군방첩대장, 수경사령관으로 20년간 최측근에서 대통령 박정희를 보좌했다. 윤필용은 육군방첩대장으로 있던 1965년 5월 원충연 대령 등이 주도한 쿠데타 모의를 적발하는 공을 세웠고, 맹호부대장으로 베트남에 갔다가 돌아와 1970년 1월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중앙정보부장은 이후락, 청와대 경호실장은 박종규, 보안사령관은 김재규로 수경사령관 윤필용까지 4인이 박정희 정권을 떠받치고 있었다. 박정희는 이들 4인을 적당히 경쟁시키고 서로 견제하게 하며 권력을 관리했다.

 

세간에서는 윤필용의 수경사가 필동 육군본부라고 불렸다. 박정희는 국방부 장관이나 육군참모총장 인선 등 군 고위인사를 윤필용과 상의했다. 이 때문에 윤필용의 집에는 3성 장군 등 군 선배들이 세배오고 육군참모총장이 인사를 오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겉에서 보기에는 김종필이 2인자다, 이후락이 2인자다, 정일권이 2인자다 하고 있었지만 진짜 2인자는 윤필용이었던 셈이다.

 

 

유신 단행 이전에도 대통령 박정희는 2인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조금 치고 나간다 싶으면 다른 측근들의 견제가 집중되어 김종필 세력이 칼을 맞은데 이어 김성곤 등 4인 체제도 몰락했다. 유신을 전후한 시기에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비중이 증대되었다. 이후락이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와 7·4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내자 그에 대한 대중적 인기가 크게 치솟았다.

 

유신의 기획과 실행 과정에서 이후락의 역할은 뚜렷했으며, 윤필용도 처음에는 이후락을 견제하다가 이후락에 대한 박정희의 신임이 두터운 것을 확인하고 그와 손을 잡았다. 이후락과 윤필용이 가까워지는 것을 정작 박정희는 바라지 않았다.

 

박정희 뿐이 아니라 10년 가까이 경호실장을 맡아온 박종규도 마찬가지였다. 박종규는 중앙정보부와 같은 방대한 조직을 이끌어보고 싶어 했다. 박종규는 김형욱이 물러난 중정부장 자리를 노렸지만, 중정부장 자리는 김계원을 잠시 거쳐서 이후락에게 갔다. 중앙정보부장을 맡은 이후락은 펄펄 날았고, 윤필용은 세를 키워 까닥하면 그 자리를 이어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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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를 이어 보안사령관을 맡은 강창성은 이후락-윤필용의 구도에 맞서 박종규와 손을 잡았다. 이들 4인 이외에 박정희의 측근 한 명이 더 등장한다. 청와대 대변인과 문공부 장관을 거쳐 서울신문사 사장으로 있던 박정희의 골프 파트너 신범식이었다. 윤필용이 이후락과 작당하여 박정희가 노쇠하였으니 물러나게 하고 다음은 ‘형님’(이후락)이 해야 한다는 소리를 하고 다닌다는 것을 박정희에게 고한 인물이 바로 신범식이었다.

 

보안사령관 강창성은 박정희로부터 윤필용을 조사하고 필요하면 이후락도 잡아들이라는 특명을 받았다. 박정희가 윤필용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신범식에게서만 듣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는 강창성에게 윤필용을 조사할 때 전두환이 내용을 잘 아니 그를 불러 물어보라고 했다.

 

윤필용과 가까웠던 것은 여러 차례 같이 근무한 노태우였는데, 연대장으로 있던 노태우는 서울에 오면 윤필용에게 자주 들렀으며, 이때 윤필용은 박정희의 건강이 나빠 오래 못 산다느니, 여색은 왜 그리 밝히냐느니 하는 ‘불경스러운’ 말을 많이 했다. 이 이야기는 때로는 노태우가 직접, 때로 전두환을 통해 박종규에게 전달되었고 박종규는 전두환이 박정희에게 직접 이 이야기를 할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윤필용 등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육사 11기 이하의 장교들로 하나회라는 비밀 사조직이 있다는 것을 밝혀낸 강창성은 사건을 확대해 하나회에 대한 본격적 수사를 준비했다. 이로 인해 위기에 빠진 전두환, 노태우를 구해준 것은 박종규와 서종철(국방부 장관), 진종채 등 영남 출신 장성들이었다. 그들은 박정희에게 강창성 보안사령관에 의해 박정희 자신이 군대 내의 친위대로 육성한 하나회가 초토화되는 것을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윤필용을 잡은 강창성은 영남 군 세력의 반격으로 보안사령관에서 밀려난 후 예편되었다. 강창성은 이후 전두환 등 신군부가 집권한 뒤 감옥에서 삼청교육을 받아야 했다. 

 

 

윤필용은 크게는 쿠데타 음모, 작게는 불경죄로 잡혀갔지만, 박정희와 강창성은 윤필용을 파렴치한 부정축재자로 처벌했다. 박정희의 여색을 거론한 괘씸죄 때문인지 사건의 판결문이 노골적으로 원색적이었다. 방탕생활, 엽색행각, 인면수심의 향락 등의 표현이 판결문 속에 들어있을 정도였다. 윤필용은 해당사건이 보안사에 의해 고문으로 조작된 것이라는 이유로, 윤필용 자신이 아니라 그가 사망한 직후에 아들이 청구한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윤필용 사건을 기점으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났고, 그 여파로 박정희 주변의 권력구도는 크게 변했다.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을 제외하고는 핵심 측근들 대부분이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갔다.

 

윤필용은 감옥으로 갔고,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물러나 있던 김형욱은 윤필용이 잡혀가자 바로 대만으로 빠져나갔다가 미국으로 망명해버렸다. 이후락은 윤필용 사건으로 흔들린 입지 만회를 위해 김대중 납치사건에 적극 나섰다가 교체되었고, 강창성은 토사구팽 당했으며 김대중 납치사건은 재일동포 사회에 반박정희 정서를 폭발시켰다.

 

이로 인해 문세광의 박정희 대통령 저격미수(육영수 서거) 사건이 이어졌고, 경호실장 박종규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그 후임자가 차지철이고 중앙정보부장 자리는 신직수를 거쳐 김재규에게 돌아갔다. 윤필용 사건에서부터 유신정권의 종말까지 여러 사건들이 마치 고리에라도 엮인 듯이 연쇄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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