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 국공내전
일제 패망 뒤에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과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이 벌인 대결을 국공내전이라 부른다. '국공내전' 하면 떠오르는 것이 국민당의 부패'다. 국공내전의 승부를 가른 핵심 요인이 국민당의 부패라는 주장이 널리 믿어지고 있다.
장제스는 국공 내전에서 패한 이유가 국민당의 부정 부패였다고 생각해, 중화민국의 공직자들의 부정 부패를 강력한 처벌로 일소하였다. 하지만 국민당 이외의 정당들은 형식적인 정당에 불과한 국민당 일당 독재, 진보적인 정치세력에 대한 백색 테러로 불리는 보수 테러, 독재에 저항하는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탄압으로 인해 장제스는 '중화민국의 민주주의가 늦게 뿌리내리게 한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는다.
북한 측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국공내전 시기 중국공산당을 지지하는 격문을 만들어 뿌린 적이 있고, 북한 내 물자와 병력을 직접 제공했다. 1945년 모택동의 지시로 북한을 방문한 천윈의 요청에 따라 10만정의 무기와 탄약을 공급했고, 중국에 광목을 보내기 위해서 북한 전역에서 면직물을 징발했다. 이런 관계가 북한과 중국공산당의 동맹, 혈맹 관계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국공내전 시기 일본인들도 본의가 아니게 중국공산당과 국민당 양측에 이용되거나 소극적으로 참전했다. 만주에 억류 중이었던 1만여 명의 일본군이 8로군에 편입되어 공산군에 훈련과 전쟁기술을 전수했다. 일본인 의료진 등이 중국공산당의 강요로 동북군의 의교기관에 편입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둔 미국은 동아시아 패권을 확보하기 위해 국공내전에 고도로 개입했을 뿐 아니라 이 전쟁을 조종하기까지 했다.
미국은 전투병 파견까지 포함, 여러 방법으로 국민당을 지원했다. 미국은 사실상 국민당의 후견인이면서 기획자였다. 중국을 동아시아 전진 기지로 삼기 위해서 미국은 돈과 몸과 시간과 머리를 투자했다. 국공내전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실은 미국-국민당 연합과 공산당의 대결이었다. 미국과 연합한 국민당이 이 전쟁의 패자라면, 당연히 미국도 패자다.
미국이 국공내전의 실질적 패자이지만, 오늘날 이 전쟁이 미국의 패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국민당의 무능과 부패가 결정적 패배 요인이었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훨씬 더 강하다.
현대 동북아시아 질서는 일본에 대한 미국의 승리와 함께 시작됐지만, 다른 한편 중국에 대한 미국의 패배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비겼으니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전적은 신통치 않았다. 동남아시아까지 범위를 넓혀도 필리핀에서 승리, 베트남에서 패배로 동아시아 전체에서는 역시나 반타작에 그쳤다.
미국은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이래 항상 해외 영토에 대해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쿠바의 전략적 가치에 눈독을 들이던 미국은 중국 무역과 세력 팽창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필리핀에도 특별한 관심을 두었다. 카리브 해의 쿠바와 태평양의 필리핀은 미국의 원대한 계획 중 일부였다.
이미 스페인 지배에 저항했던 필리핀은 오랫동안 독립투쟁을 벌여왔다. 호세 리잘의 처형 이후 무장봉기했던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홍콩으로 망명한 상황이었다. 스페인과 개전하기 전 에밀리오 아기날도를 귀국시켰던 미국은 필리핀 혁명군의 협력을 구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필리핀 인들은 오랜 식민 상태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룰 것이라는 생각에 환희에 차 있었고, 미국을 자유와 독립의 후원자로 여겼다.
그러나 종전 과정에서 미국은 필리핀 혁명정부와 위장평화 협상을 진행하는 한편 식민 지배를 위한 병력을 비밀리에 증파했다. 마침내 미국은 필리핀 혁명정부와 전쟁을 벌였다. 필리핀 혁명군의 저항은 3년 2개월 동안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필리핀 인들이 학살당했다. 필리핀 정복을 위한 미국의 전술은 한마디로 ‘대량학살’이었다.
일찍이 대한제국의 고종은 미국을 ‘영토 욕심이 없는 나라’로 믿고 여러 차례 도움을 청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 의해 보호국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고종은 친한파 미국인이자 조선 주재 미국 공사 호머 헐버트를 특사로 파견했다. 호머 헐버트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조선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당신은 왜 패할 나라를 지지하려 하는가. 스스로를 위해 단 한 번의 일격도 가할 수 없는 나라를 위해 미국이 헛되이 개입할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당시의 미국은 그보다 한 달 전 도쿄에서 필리핀(미국)과 한반도(일본)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인정하기로 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뒤였다. 그로부터 석 달 뒤, 마침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호머 헐버트는 “미국은 작별인사도 없이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가장 먼저 조선을 버렸다”고 기록했다.
미국을 통해 자유와 독립을 꿈꿨던 필리핀의 희망과 영토 욕심 없는 국가의 지원을 바랐던 고종의 짝사랑은 결국 망국으로 이어졌다.